가상현실 기술이 어느덧 일상에 깊이 자리 잡은 요즘, 이제 VR은 단순한 즐길 거리를 넘어 다양한 사회 문제 해결을 위한 수단이 되었다. 최근 신경 발달 장애를 지닌 청소년들이 급증하면서 이들이 겪는 학습 및 사회 적응의 어려움, 정서적 고립, 그리고 대인관계에서의 소통 문제 등이 심각한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이러한 문제들은 청소년들의 일상뿐 아니라 미래의 사회적 통합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이를 위한 효과적인 지원과 재활 방안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는데 이 과정에서도 가상현실 기술이 유용한 도구로 급부상하고 있다.
핀란드의 "가족을 위한 디지털 자원(Digi perheiden voimavarana)”은 디아코니아 기술대학교(Diakonia-ammattikorkeakoulu, 약칭 Diak) 주관으로 2021년 가을부터 2023년 8월까지 진행된 프로젝트다. 유럽 사회 기금(ESF)의 지원을 받아 추진된 이 혁신적인 프로젝트는 VR 기술을 통해 신경 발달 장애 청소년들이 일상에서 마주하는 다양한 도전 과제를 가상현실 속에서 안전하게 연습하도록 돕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중에서도 청소년들의 내면 탐색이 중심이 된 “이너 비전스(Inner Visions, 내면의 시선)” 가상현실 게임은 프로젝트의 핵심 성과 중 하나로 꼽힌다. 디지털 혁신이 더디게 진행되던 사회복지 분야에서 VR 분야를 접목해 매우 신선한 동시에 새로운 재활의 장을 연 동시에 사회복지 전문가들이 디지털 도구를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만드는 역량 강화 계기가 되었다.
본 프로젝트의 핵심 성과인 가상현실 게임, 이너 비전스를 개발한 버추얼 던(Virtual Dawn)은 2012년에 창립한 핀란드 게임 회사로, 게임 개발과 게임 교육 커뮤니티를 운영 중이다. 회사는 8명의 직원과 300여 명의 게임 개발 커뮤니티 멤버의 협력으로 운영되며 20여 개 이상의 게임을 개발한 바 있다. 공공 기관과의 협력 프로젝트로 개발된 교육용 가상현실 게임들은 VR 게임과 애플리케이션을 위한 플랫폼인 사이드퀘스트(SideQuest, https://sidequestvr.com/)에서 무료로 이용이 가능하다. 또한 유니티 게임 엔진을 위한 소프트웨어 개발 키트도 디스코드 커뮤니티(https://discord.gg/pTdzDHC5ax)에서 공유한다.
개발비로 20,000유로라는 비교적 적은 예산이 책정되었음에도 이너 비전스가 탄생하게 된 것은 사내에서 제작한 기존의 게임을 프로젝트 취지에 맞게 발전시켰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버추얼 던은 최종 완성된 게임을 오픈소스 형태로 무상 제공해 공공기관과 학교, 개인 사용자가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으며 심지어 기존의 게임을 변형하는 것까지 허용한다. 다만 추가적인 개발을 위해서는 회사에 정식으로 요청해 승인받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렇게 개발된 소스는 다시 버추얼 던과 공유하며 결과적으로 가상현실 게임 기술을 함께 발전시켜 나갈 수 있게 된다.
이너 비전스의 게임은 대략 이렇게 진행된다. 일단 게임을 시작하면 가이드가 VR 게임의 기본 조작법과 배경에 관해 설명한다. 사용자는 하늘을 나는 헬퍼펫의 안내를 받아 여러 장소로 이동하며 다양한 상황에서 의사 결정을 해야 한다. 맨 처음 도착한 곳에서는 장작불 주변에 모여 있는 무색, 무표정의 사람들을 만난다. 이들은 사용자의 행동에 따라 차갑게 또는 따뜻하게 반응하며 사용자는 여러 미션을 통해 자신이 취한 행동의 결과를 퍼즐처럼 맞춰가며 장소를 이동한다. 예를 들면 추위에 떠는 사람에게 장작불을 가져다주면 분위기가 따뜻해지지만 피해를 입히면 결과가 틀어지는 식이다. 그 과정에서 사용자는 벽을 타고 오르거나 독버섯에 중독된 사람을 돕기 위한 해독제를 찾는 등의 미션을 수행한다. 게임의 마지막 단계에서는 자기 내면의 깊숙한 곳에 존재하는 어둠을 상징하는 괴물과 마주하는데 다른 플레이어와 힘을 합쳐 물리쳐야만 게임이 끝난다.
이 게임이 개발자뿐 아니라 사용자들 사이에서 좋은 평가를 받는 이유는 게임이 진행될수록 복지사와 청소년이 자연스럽게 더 깊은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다는 점이다. 게임 중 청소년이 내린 선택과 이유, 그리고 결과에 대해 이야기할 때 복지사는 자연스러운 맥락에서 “내가 도움을 받을 때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혹은 누군가를 도왔을 때 어떤 느낌이었는지?”와 같은 꼬리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가상현실 게임이 어려움과 씨름하는 청소년들의 문제를 온전히 다 해결하지는 못하지만 이너 비전스의 사례처럼 대화의 문을 열고 재활을 시작할 수 있게 돕는다는 점에서 아주 유용함을 알 수 있다.
사회 적응 및 학습에 어려움을 겪는 청소년을 돕기 위해 개발된 만큼 이너 비전스는 개발 초기 단계부터 사용자의 피드백을 적극 반영해 왔다. 첫 기획 단계부터 총 네 집단의 이해관계자(게임 회사, 대학교 관계자, 사회복지 전문가, 청소년)가 디자인 과정에 참여했으며 그중 특별히 최종 사용자인 청소년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렴했다. 버추얼 던의 대표 안띠 마르티카이넨(Antti Martikainen)은 "처음에는 슈퍼 히어로 캐릭터를 포함한 아이디어를 제안했지만 청소년들이 이를 유치하다고 평가했다"며 "그들은 더욱 어둡고 진지한 분위기를 원했다"고 밝혔다. 그 결과 청소년이 자신의 내면을 탐험하며 감정을 살피고 스스로 결정하는 어드벤처형 게임이 완성되었다.
또 다른 특징으로는 감정을 들여다보는 게임임에도 불구하고 특정 메시지가 전달되지 않도록 고안되었다는 점이다. 사용자는 게임이 끝난 뒤에도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명확히 모른다. 다만 게임 속에서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자신의 머릿속을 탐색하며 결정을 내릴 뿐이다. "자기 자신과 소통하고 스스로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을 때, 결국 다른 사람에게도 도움을 청하거나 도울 수 있다”는 메시지를 자연스럽게 전달하려는 것이 이 게임의 의도다.
게임의 배경은 현실 세계를 사실적으로 보여주지 않고 추상적인 내면의 세계로 묘사된다. 자신이 겪는 어려움과 한계를 가장 잘 인식하고 있는 사용자들은 자신의 문제점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현실에서 해결책을 찾아내라는 미션을 불편하게 받아들였다. 그렇기에 이너 비전스는 유저 스스로 자신의 영혼과 정신으로 들어가 상상의 세계에서 스스로를 돕는 환경으로 구성되었다. 게임의 전체적인 화면 구성 역시 어두운 내면의 동굴 속을 탐험하듯 안으로 깊숙이 파고 들어간다.
또한 이너 비전스는 유니버설디자인의 핵심 원칙을 적용해 만들어졌다. 단순하고 직관적인 디자인을 목표로 만들어진 만큼 게임 인터페이스와 조작법 역시 신경 발달 장애가 있는 사용자가 쉽게 이해하고 구동할 수 있다. 또한 다양한 능력 수준을 고려해 사용자가 자신에게 맞는 속도로 게임을 진행할 수 있도록 유연하게 구성했다. 진행 과정에서 발생하는 오류나 실수가 즉각적인 미션 실패로 이어지지 않고 오히려 사용자가 이를 학습 기회로 삼아 다시 도전할 수 있도록 만드는 식이다. 이 외에도 시각 및 청각 피드백을 통해 게임의 상황을 명확히 이해하도록 돕는다. 이처럼 사용자를 세심하게 고려한 디자인 덕분에 이너 비전스는 신경 발달 장애 사용자뿐 아니라 다양한 배경과 능력을 지닌 대중에게 쉽게 다가가는 디지털 도구로 발전할 수 있었다.
현재 핀란드어와 영어 서비스를 제공하는 이너 비전스 게임은 약 30분 정도 진행된다. 지금까지 약 천 명의 사용자가 다운로드했으며 핀란드 전역의 일반 고등학교, 직업 고등학교, 대학교에서 자체 라이브러리 시스템을 통해 무료로 설치해 사용 중이다. 이처럼 공익적 이점이 무수히 많은 게임임에도 후속 조치에는 조금 아쉬운 측면이 있다. 프로젝트 지원금으로 개발되어 마케팅 비용이 책정되지 않아 얼마나 많은 사용자가 이용 중인지 모니터링하거나 오류를 개선하는 등의 조치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버추얼 던은 지금도 계속해서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교육 시뮬레이션 게임 개발 노하우를 쌓아가고 있다. 지난해 그 결과물로 탄생한 “브루-겟 투 워크(Vrew - Get To Work)”는 학습과 집중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청소년을 위한 슈팅 게임이다. 이 게임은 핀란드의 루오비 직업 전문학교(Luovi Vocational College)와의 협업으로 이루어졌다. 제시간에 잠자리에 들고 일하러 가는 과정 중에 발생한 장애물을 총으로 제거하거나 필요한 아이템을 모아 좋은 결과를 얻는 게임이다. 학생들은 이 게임을 통해 주어진 시간 안에 과제를 해결하고 집중하는 훈련을 할 수 있다. 이 게임 역시 이너 비전스와 같은 방식으로 사이드퀘스트(https://sidequestvr.com/app/18967/vrew-get-to-work)에서 무료로 다운로드 가능하다.
이처럼 버추얼 던은 기존 게임을 바탕으로 공교육 기관에서 활용할 만한 프로그램을 저비용 최단 시간 안에 개발해 무상 배포하는 엄청난 공익적 기동성을 자랑한다. 대표 안띠 마르티카이넨에 따르면 "우리는 앞으로도 더 많은 사람들의 요구를 반영한 게임을 개발하고, 시스템과 콘텐츠를 무료로 제공하여 사람들이 자신만의 버전으로 응용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라고 한다. 앞으로도 버추얼 던은 가상현실 게임의 발전과 함께 더 많은 사용자가 게임을 변형하고 발전하도록 장려할 전망이다.
핀란드의 "가족을 위한 디지털 자원” 프로젝트는 단순히 신경 발달 장애가 있는 청소년을 위한 게임 개발을 넘어 기술과 사회복지의 접점을 찾는 데 중요한 진전을 이뤘다. 특히 이너 비전스는 유니버설디자인 원칙을 바탕으로 누구나 쉽게 접근 가능하고 참여할 수 있는 디지털 재활 도구를 만들어 냈다. 게임을 통해 복지사와 청소년 간의 자연스러운 대화를 유도하고 사회적 상호작용을 강화하는 데 기여해 신경 발달 장애 청소년들의 재활 과정에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이러한 행보는 버추얼 던에 그치지 않고 앞으로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디지털 기술과 유니버설디자인이 결합된 새로운 재활 방법들이 계속 개발될 것이며 버추얼 던과 같은 혁신적인 기업들이 사회적 요구에 부응해 더 나은 환경을 제공할 것으로 기대된다. 이너 비전스는 그 시작점에서 재활 도구로서 가상현실 기술이 어느 정도 기여 가능한지 그 포문을 열었다. 앞으로도 가상현실을 활용한 청소년의 사회 적응 프로그램이 추후 더 많은 영역에서 실질적 변화를 끌어낼 것으로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