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니버설디자인의 핵심은 ‘배려’다. 유니버설디자인은 제품 · 환경 · 서비스를 디자인할 때 모든 사용자를 배려하는 것이다. 그동안 유니버설디자인을 보급하려고 다양하게 노력한 결과 공공시설 이용 편의가 나아진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여전히 유니버설디자인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용자들이 많다. 이중에는 보호자 없이 이동 및 생활이 힘든 중증장애인, 이성의 보호자를 동반하는 사람, 외모에서 장애 유무 또는 성별 구별이 어려운 사람, 반려동물 등이 포함된다.
최근 장애인들의 사회활동이 느는 추세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이들의 맘 편히 외출할 수 있는 편의시설 환경을 충분히 마련해놓지 못했다. 일례로, 외출 시 기저귀 착용이 반드시 요구되는 중증장애인이 적지 않음에도, 성인용 기저귀 교환대를 갖춘 공공 장애인 화장실은 무척 드물다. 이 경우, 중증장애인들은 차갑고 지저분한 화장실 바닥에 누워 보호자가 기저귀 교환해주는 처지에 놓이기 때문에 자연히 외출을 자제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은 과거 영국의 일이기도 했다. 환경이 개선된 것은 2003년. 중증장애인 아들을 둔 로레토 램(Loretto Lambe)의 캠페인을 시작으로 상황이 달라졌다. 그녀는 화장실 바닥에 아들을 눕힌 채 기저귀를 교환해야 하는 비인간적 상황을 겪은 뒤 성인용 기저귀 교환대 시설을 갖춘 체인징플레이스 화장실(Changing Place Toilet) 설치 운동을 주도했다.
체인징 플레이스 화장실은 새로운 유형의 공공 장애인 화장실이다. 최소 2인 이상이 움직이는 데 충분히 넓은 이 화장실은 높이 조절이 가능한 성인용 기저귀 교환대, 사용자를 휠체어에서 기저귀 교환대로 이동하도록 돕는 천장 호이스트(Ceiling Hoist)와 변기, 세면대, 프라이버시 스크린, 커다란 롤 화장지, 대형 쓰레기통이 구비되어 있다.
램은 중증 장애와 복합 장애를 가진 장애 아동 및 성인들의 부모들과 연대해 체인징 플레이스 화장실 보급을 위해 PAMIS(Promoting A More Inclusive Society: 보다 포용적 사회 촉진)라는 자원봉사 조직을 만들고, 부모들이 지저분한 화장실 바닥에서 기저귀를 교환하는 영상을 제작해 배포했다. 2006년에는 이 영상으로 노팅엄시 의회를 설득해 시 청사에 최초로 체인징 플레이스 화장실을 설치하는 데 성공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2023년 현재 영국의 주요 쇼핑센터, 공항, 관광 명소, 레저 시설 등에는 모두 1,956개의 화장실이 설치돼 있으며, 체인징 플레이스 화장실 설치 운동은 영국을 넘어서 호주, 아일랜드, 미국 등으로 확대되고 있다.
공공 화장실 이용과 관련해 배려가 필요한 또 하나의 사용자 그룹은 이성의 도움을 받아서 화장실을 이용해야 하는 사람들과 성 소수자들이다.
일반적인 공중화장실은 남자 화장실, 여자 화장실로 분리되어 있다. 이에 따라 장애 등으로 인해 이성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 즉 화장실 이용을 위해 엄마의 도움을 받는 아들, 아내의 도움을 받는 남편, 딸의 도움을 받는 아버지 등의 화장실 이용은 쉽지 않다. 트랜스젠더 등 성 소수자들도 마찬가지다. 외관상 성별이 모호하게 비치는 이들은 집 밖에서 용변을 보는 것에서 상당한 심적 압박을 느끼게 된다. 오죽하면 트랜스젠더 집단에서 방광염, 변비, 치질 등 발병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을까.
한국도로공사는 2016년부터 고속도로 휴게소의 장애인 화장실을 가족사랑 화장실로 교체하고 있다. 가족사랑 화장실은 장애인뿐 아니라 노인, 임산부, 영유아 등 일반 화장실 이용에 어려움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용할 수 있도록 설비를 추가하고 명칭을 변경한 것이다. 이러한 취지에 대한 공감으로 고속도로 휴게소, 박물관 등에 가족사랑 화장실이 설치되는 사례가 증가한 것. 그러나 문제는 기존 공중 장애인 화장실 자리에 가족사랑 화장실을 설치하는 데 있다. 즉 기존 장애인 화장실 면적에 유아용 변기 등을 추가적으로 배치함으로써, 장애인 화장실 사용자가 불편을 겪는다는 것이다. 기존 가족사랑 화장실을 확충하는 것이 아니라 장애인 화장실을 개조하는 작업으로 말미암아 일반 화장실 이용이 불가능한 장애인의 대기 시간이 길어지고 휠체어 이용자의 화장실 내에서의 이동 등이 어려워지고 있다.
누구나 다목적 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을 악용하여 일반 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는 사람들도 다목적 화장실을 사용하는 것도 문제다. 다목적 화장실을 설치한 지 우리보다 오래된 일본에서도 다목적 화장실에서 본래 화장실 설치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 이유(화장 고치기 등)로 화장실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늘어, 정작 필요한 사용자들이 오래 기다려야 한다는 볼멘소리가 심심치 않게 들린다.
공공 장애인 화장실을 이용하는 데 불편을 느끼는 또 다른 집단은 장루 장애인(ostomate)이다. 장루 장애인은 직장암 등의 이유로 장을 절제하여 복부 표면에 인공 항문을 만들어 배변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장루 주머니를 차고 다니기 때문에 외관상 장애인처럼 보이지 않지만 사회생활 시 장애가 겉으로 드러나는 사람들 이상으로 어려움을 안고 있다. 이로 인해 우울증, 근심, 그리고 낮은 자존감과 같은 심리적 문제를 경험하게 되어 사회활동이나 여행을 꺼리게 되기도 한다.
장루 장애인은 외출 시 화장실에서 장루 주머니를 비우고 세척해야 하는데, 국내에는 장루용 세척기가 설치된 공중 화장실이 거의 전무한 실정이다. 그래서 장루 장애인용 세척기 대신에 대부분 변기에 장루 주머니를 비운다. 그런데 화장실의 변기가 낮기에 무릎을 굽혀 장루 주머니를 비울 때 주로 오물이 옷에 묻어 곤란하다. 장루 주머니를 비우고 나서는 주머니 세척을 위해 세면대를 사용하는데 세면대와 변기의 사이가 멀어서 불편하고 중간에 오물이 떨어질까 불안해하기 일쑤다.
일본에서는 1998년 나라시노 현청에 장루용 세척기를 최초로 설치한 이후, 장루 장애인을 위한 세척기 보급이 가속화되어 현재는 일정 규모의 신축 건물에는 장루용 세척기 설치가 의무화되어 있다. 2000년 4월 일본 정부는 고령자와 장애인들이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교통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 “교통배리어프리법”을 제정하면서 장애인 화장실 설치 규정도 함께 개정했다. 이에 따라 2,000㎡ 이상의 공공건물과 50㎡ 이상의 공공 화장실 신축, 증축 및 용도 변경이 있을 때 장루용 세척기를 의무적으로 설치하도록 되어 있다. 이로 인해 일본에 가면 공항, 지하철역, 심지어 호텔 등 공공시설에서도 장루용 세척기를 쉽게 볼 수 있다.
유니버설디자인에서 배려해야 할 대상에는 동물도 빠질 수 없다. 유니버설디자인은 모든 사람을 위한 디자인이라는 말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이 얘기는 엉뚱하게 들릴 수 있지만, 이 지구는 인간뿐 아니라 모든 생명체를 위한 것이고, 동물 복지는 곧 인간 복지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에 인간만큼이나 중요하다.
고속도로나 시골길을 운전하다 보면 동물 사체를 심심치 않게 보게 된다. 이러한 사고들은 자동차가 밤에 도로를 횡단하는 동물들과 부딪쳐 생기는 경우가 많은데, 이를 목격할 때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안타깝고 가슴 아파한다. 야생동물들은 먹이나 짝 그리고 서식지를 찾아 도로를 건너다가 사고를 당하기 일쑤인데, 인간 사회로 점령된 지금의 환경은 이들의 안전한 이동을 보장하는 안전 통로가 부족하다.
야생동물안전통로는 국립공원이 많은 미국, 캐나다 등을 중심으로 조성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도 최근 들어 고속도로의 안전 통로 설치가 늘고 있다. 그 결과 한국도로공사에 의하면, 2023년 고속도로상에서 사망하는 동물 수가 2015년에 비해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한국도로공사는 야생동물의 위험한 이동을 막기 위해, 매년 50km 펜스를 설치하고 있으며 고속도로 신규 건설로 차단되는 동물 서식지를 지켜내기 위해 건설 중인 모든 고속도로에 안전 통로를 만들 계획이다. 고속도로 외에 야생동물 이동을 위한 통로가 서울시 한복판에 조성되기도 했다. 서울 도봉구는 수십 년 동안 북한산국립공원과 쌍문근린공원 간 녹지 축을 잇는 해등로 녹지 연결로를 최근 개통했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물론 소형 야생동물 등이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게 됐다.
2022년 동물보호 국민 의식조사에 의하면 반려동물을 키우는 국내 세대수는 602만 가구로, 전체 가구 수의 1/4을 넘어섰다고 한다. 이를 지역별로 나누면 서울이 110만 세대, 경기도가 129만, 인천시가 33만 세대에 이른다. 환경이 반려동물 친화적으로 조성되는 것은 시급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반려동물 친화적 환경의 예를 들면, 반려견을 위한 음수대 마련이다. 미국의 주택가 인근 공원에 설치돼 있는 음수대들은 여러 높이에 수도꼭지가 위치해 성인, 휠체어 이용자, 어린이는 물론 반려견도 편안하게 물을 마실 수 있다. 그리고 미국의 산책로에는 반려견 배변 봉투와 쓰레기통을 갖춘 시설(Pet Waste Station)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반려동물 증가와 더불어 반려동물과 여행하는 사람 수도 늘고 있다. 반려동물과 비행기로 여행할 때 문제점 중의 하나는 국내 공항에는 서비스견이나 반려견의 배변 시설이 없다는 점이다. 인간과 마찬가지로, 반려동물들도 비행기로 여행할 때 용변을 봐야 하지만 이런 시설은 세계 최고의 공항을 지향하는 인천 공항에도 없다. 이는 유럽, 일본, 미국의 공항과 대조적이다. 매년 대략 만 마리의 개가 경유한다는 핀란드 헬싱키 공항은 반려견과 서비스견을 위해 2020년 실내에 반려견 화장실(Pet Relief Area)을 두 개 설치했고 이듬해 공항 외부에 한 개를 더 추가했다. 일본 도쿄 하네다 공항과 많은 미국의 공항에도 맹인용 안내견이나 반려견을 위한 화장실이 설치되어 있고, 특히 미국 애틀랜타 하트필드 잭슨(Hartsfield-Jackson) 공항에는 터미널 실내외에 개와 고양이가 사용할 수 있는 화장실이 마련되어 있다. 이 시설들은 2015년에 제정된 미연방정부법에 따라 설치된 것으로, 이 법은 매년 만 명 이상의 여객이 탑승하는 항공기가 운행하는 공항들은 2016년 8월까지 서비스 동물을 위한 화장실(animal relief areas)을 갖추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인천 공항을 비롯한 국내 공항들은 시설이 세계적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유명무실하게도 시각장애인 동반 서비스견이나 반려견을 위한 시설은 전무하다. 이와 같은 상황은 국내에 있는 반려동물 및 보호자의 불편을 줄 뿐만 아니라 반려견 화장실이 있는 해외 공항에서 국내 공항으로 이동하는 해외 여행객 및 반려동물에게도 상당한 어려움을 안겨준다.
유니버설디자인이 국내에 소개된 지 20년 이상이 되면서 공공 분야에서의 유니버설디자인의 보급이 확대되고 있지만, 여전히 유니버설디자인은 멀게만 느껴진다. 아직도 유니버설디자인 시설의 수혜를 받지 못하는 사용자들이 너무 많다. 예산 문제로 모든 공공시설마다 설치할 수는 없지만, 고속도로휴게소, 박물관 등 대형 공공시설만이라도 화장실 바닥에서 기저귀를 바꿔야 하는 중증장애인을 위한 체인징 플레이스 화장실을 설치해야 한다. 남녀 일반 화장실 사용이 불편한 이성 동반 화장실 사용자, 성소수자 등을 배려한 다목적 화장실 보급 또한 확대되어야 한다. 공중 장애인 화장실을 다목적화장실로 전환하고 필요한 설비를 추가함으로써 휠체어 사용자 등 기존 사용자가 더 불편해지는 일이 없도록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것도 잊어선 안 된다. 겉보기에 장애인처럼 보이지 않는 장루 장애인을 위해 장루용 세척기를 설치해 그들이 외출을 주저하지 않고 원활한 사회생활이 가능하도록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야생동물과 반려동물 같은 동물들도 유니버설디자인 적용 대상임을 간과하지 않고, 공공시설, 환경 등을 동물 친화적으로 가꿔야 한다. 야생동물이 자기 서식지를 자유롭고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도록, 고속도로뿐 아니라 일반 도로에도 안전 통로를 확충해야 한다. 반려동물은 말 그대로 한 가족의 일원이다. 따라서 반려동물과 편하게 외출하고 산책하고 생활할 수 있도록 공공시설 및 환경이 마련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유니버설디자인을 통해 배려해야 할 사람들을 확대하고, 반려동물 및 야생동물로 그 대상 영역을 확장해 생각하는 일은 쉽지 않지만, 우리 사회를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시키는 데 있어 반드시 필요한 일이고, 충분한 가치가 있는 일이다. 유니버설디자인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모두가 잘 살 수 있는 유니버설사회 실현’을 위해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